걸린 부분
시편 23:1을 읽을 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첫 구절을 지나 2절과 3절의 푸른 풀밭, 쉴 만한 물가, 영혼을 소생시키신다는 표현까지 오면, 이 말이 정말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인지 묻게 될 때가 있어요.
4절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5절의 상 차림과 기름 부으심, 6절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따른다는 말까지 읽고 나면, 이 시가 단순히 위로의 문구를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을 가진 고백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그런데 그 흐름을 정확히 붙잡기가 쉽지 않을 때가 있어요. 목자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는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 그림인지,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어떻게 가능한지 같은 물음들이에요. 이런 물음을 붙잡고 오래된 주석가들의 글을 찾아보면, 같은 본문을 두고도 시선이 갈리는 부분들이 보여요. 그 갈림을 하나씩 짚어 보려고 해요.
본문과 주석
1절, 목자는 누구인가
존 길은 1절의 목자를 여호와 아버지가 아니라 아들, 곧 그리스도로 봐요. 다윗이 "나의 목자"라고 부른 것은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서 그분을 따르는 관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해요. 반면 카일과 델리치는 이 목자를 훗날 예언서에서 나타날 목자상과 연결하면서도, 본문 자체는 여호와께서 한결같이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춰요. 매튜 헨리도 비슷하게, 다윗이 스스로 목자였던 경험에서 이 표현을 끌어왔다고 보면서 하나님께서 목자 되심을 강조해요. 같은 구절이지만 그리스도로 읽을지,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으로 읽을지에서 결이 나뉘어요.
2절,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
존 길은 푸른 풀밭을 은혜의 언약과 그 약속들로, 쉴 만한 물가를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연결해요. 매튜 헨리는 좀 더 실제적인 방향으로, 이 표현들이 일상의 필요를 공급받는 것과 하나님의 규례 안에서 누리는 안식을 가리킨다고 해요. JFB는 이 표현들을 음식보다는 쉼과 안전을 위한 장소로 읽어야 한다고 짚으면서, 쉴 만한 물가는 거센 물살도 아니고 고여서 썩은 물도 아닌, 잔잔히 흐르는 물이라는 점을 강조해요. 카일과 델리치는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 표현이 오아시스나 푸른 지대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설명하면서, 지치고 마른 자가 쉼과 회복을 동시에 얻는 곳으로 봐요.
3절, 영혼을 소생시키신다는 말
존 길은 영혼을 소생시키신다는 말을 뒤로 물러난 상태에서 다시 이끌어 오시는 것, 혹은 기진맥진한 영혼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것으로 나눠서 설명해요. 카일과 델리치는 이를 마치 날아가 버린 영혼을 다시 데려와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게 하는 것과 같다고 표현하면서, 시험과 곤경 가운데서도 생명의 본질을 맛보게 하시는 일이라고 해요.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뒷부분에 대해서는 JFB가 이를 안전한 길, 하나님께서 지정하시고 기뻐하시는 길로 풀어요.
4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JFB는 이 골짜기를 높은 절벽과 우거진 숲으로 둘러싸인 협곡으로 묘사하면서, 두려운 자에게는 공포를 주고 맹수에게는 은신처가 되는 곳이라고 해요. 그러면서도 이 표현이 가장 큰 두려움, 곧 죽음 자체를 포함하되 거기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짚어요. 카일과 델리치는 이 단어가 구약에서 처음 등장하는 합성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원래 어둡게 함을 뜻하는 동사에서 나온 말이라고 설명해요. 지팡이와 막대기에 대해서는 같은 주석가가 이를 목자의 인도와 보호의 수단으로, 본래 하나였던 것이 두 형태로 나뉘어 표현된 것이라고 봐요.
5-6절, 상과 잔, 그리고 따라오는 것
JFB는 상을 차려 주심과 기름 부으심, 잔이 넘친다는 표현을 하나님의 예비하신 돌보심을 나타내는 또 다른 그림으로 묶어요. 카일과 델리치는 이를 좀 더 구체적인 역사적 정황, 곧 압살롬을 피해 도망하던 다윗과 그의 군대가 실제로 궁핍할 위험에 있었던 상황과 연결하면서도, 동시에 이것이 하늘로부터 오는 선물로서 영적인 차원을 함께 지닌다고 해요. 6절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따른다는 표현에 대해서는, 마치 선한 영들이 원수들을 압도하며 다윗을 보호하기 위해 보내진다는 식으로 묘사해요. 매튜 헨리는 이 시가 세 가지 확신으로 이어진다고 보는데, 앞의 둘은 부족함이 없으리라는 것과 어떤 악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에요. 매튜 헨리는 이것을 신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담대함의 근거로 제시해요.
오늘 할 것
오늘은 시편 23편을 천천히 소리 내어 읽어 보면 좋겠어요. 한 번에 다 읽지 말고, 1절부터 3절까지 먼저 읽고 잠시 멈춰서 목자라는 말이 지금 나의 상황에서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 보세요.
그다음 4절을 따로 읽으면서, 지금 지나고 있는 어려운 상황이 있다면 그것을 이 골짜기의 그림에 비추어 보면 좋겠어요.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상황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함께하시는 분이 있다는 뜻이라는 점을 주석가들의 설명을 참고해서 다시 확인해 볼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5절과 6절을 읽으면서, 오늘 하루 중에 상을 차려 주신 것 같은 순간, 곧 예상하지 못한 도움이나 위로가 있었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보세요. 이 시를 한 번 필사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손으로 옮겨 적으면서 어느 구절에서 마음이 멈추는지 살펴보고, 그 부분을 오늘의 기도 제목으로 삼아 보면 좋겠어요.
짧게라도 이 시편을 소리 내어 다시 읽고 하루를 마치는 것도 추천해요. 하루의 끝에 이 시를 되새기면 아침에 읽었던 것과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때가 있어요.
남은 물음
주석가들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여전히 남는 물음들이 있어요. 1절의 목자를 그리스도로 읽는 것과 여호와 하나님으로 읽는 것 사이에서, 이 둘을 굳이 나누어야 하는지 아니면 하나로 묶어 읽어도 되는지가 궁금해져요.
또한 4절의 골짜기가 역사적으로 다윗이 실제로 겪은 상황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모든 신자가 겪는 일반적인 시련을 가리키는 상징인지도 주석가들 사이에서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카일과 델리치가 압살롬 사건과 연결하는 방식과, JFB가 좀 더 보편적인 두려움의 그림으로 읽는 방식이 어떻게 함께 설 수 있는지 더 생각해 보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6절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따라온다는 표현이 이 세상에서의 삶에 국한되는 말인지, 아니면 그 이후까지 이어지는 말인지도 남는 물음이에요. 이 물음들을 안고 이 시편을 다시 읽으면, 처음 읽었을 때와는 또 다른 결이 보일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