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투 비블리카Batu Biblica

삭개오, 숨어도 찾아오시는 예수

성경읽기, 2026. 9. 18.

요약

기도가 막히고 마음이 자꾸 숨고 싶어지는 날이 있어요.
누가복음 19장 1~10절 삭개오의 만남을 옛 주석과 함께 읽어요.

이 글은 개역개정 성경을 따르고, 옛 주석 세 가지를 참고했어요. 아담 클라크(18~19세기 영국 목회자), 존 길(18세기 영국 목회자), JFB(19세기 영국 목회자 제이미슨과 포셋과 브라운)예요.

어두운 방에서 한 사람이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손을 모은 채 뒷모습으로 앉아 있다

보이지 않아 숨고 싶었던 날

기도가 막히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와요. 마음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싶은데, 정작 그분 앞에 서면 말이 나오지 않는 때가 있어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웃고 이야기해도, 조용히 혼자 무릎을 꿇으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게 돼요.

이런 순간에는 신앙 자체가 의심스러워지기도 해요. 예배는 드리는데 마음이 텅 빈 것 같고, 성경을 펴도 글자만 눈에 스쳐 지나갈 때가 있어요. 잘못한 게 있어서일까, 믿음이 약해진 걸까 이런저런 생각이 스쳐요.

그럴 때 사람들은 종종 숨는 쪽을 택해요.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자기 속을 드러내지 않고 뒤로 물러나 있는 편이 안전하다고 느껴요. 누군가 다가와 안부를 물어도 괜찮다고 웃어넘기며, 정작 가장 필요한 순간에 손을 내밀지 못해요.

누가복음 19장 1절부터 10절의 삭개오도 그런 처지에 있던 사람이에요. 사람들 눈을 피해 나무 위로 올라간 그의 모습은, 숨고 싶은 마음이 특별한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님을 보여 줘요. 오늘 이 이야기를 다시 읽으며, 숨고 싶은 마음과 그 마음까지 찾아오시는 분을 함께 생각해 봐요.

나무 위로 올라간 작은 사람

삭개오는 여리고의 세관을 맡은 사람이었어요. 아담 클라크에 따르면 그는 세리들 중 우두머리였고 재산도 많은 사람이었어요. 그런 지위와 부유함은 오히려 예수님께 다가가는 일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조건이었어요.

그런 그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던 건 특별한 믿음 때문이 아니었어요. 클라크와 존 길 둘 다 이 마음을 단순한 궁금함으로 여겨요. 예수님이 어떤 모습인지 그저 한번 보고 싶었을 뿐이라는 거죠. 대단한 결심이 아니라 그런 마음에서 이 모든 일이 시작된 거예요.

먼지 낀 옛길 옆에 크고 굵은 가지를 늘어뜨린 오래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문제는 몸이 작아서 무리 사이로 볼 수 없었다는 점이에요. 존 길에 따르면 예수님이 작아서가 아니라 삭개오가 작아서 사람들 머리 위로 보이지 않았던 거예요. 그래서 그는 뛰어가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어요. 이 나무는 여리고 부근에 흔했고 크고 튼튼해서, 사람이 올라가 멀리서도 몸을 지탱할 수 있었어요.

클라크가 짚은 흥미로운 점은 이거예요. 키가 작다는 약점이 오히려 그를 눈에 띄게 만들었다는 거죠. 만약 그가 보통 키였다면 무리 속에 섞여 아무도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을 거예요. 몸의 부족함이 오히려 은혜가 닿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예요.

예수님이 지나가실 길목에 그 나무가 있었다는 것도 존 길이 짚는 부분이에요. 삭개오가 아무 나무나 오른 게 아니라, 예수님이 지나실 길 바로 옆의 나무를 골랐다는 뜻이에요. 궁금함으로 시작한 행동이었지만, 그곳을 고른 순간부터 그는 이미 예수님과 마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셈이에요.

먼저 불러주신 그 이름

그렇게 나무 위에 오른 삭개오를, 예수님은 올려다보시며 그의 이름을 불러 주셨어요. JFB에 따르면 삭개오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었을 텐데, 예수님이 그를 알고 부르신 것이었어요. 자기 양을 이름으로 불러 이끄시는 분이라는 뜻이죠.

부름을 받은 삭개오는 서둘러 내려왔어요. 클라크가 보기에는 이 부름에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함께 들어왔기에, 삭개오가 망설임 없이 순종할 수 있었어요. JFB는 이것이 초대를 요청하신 게 아니라 스스로 그 집에 머무시겠다고 선언하신 장면이라고 짚어요. 부름을 받는 이가 아니라 부르시는 분이 먼저 움직이신 셈이에요.

저녁 무렵 옛 돌집의 나무 문이 열려 있고 그 안에서 등불빛이 새어 나온다

사람들은 삭개오를 죄인이라 불렀어요. 세금 걷는 일을 하던 그를 곱게 보지 않는 시선이었고, 예수님이 그 집에 묵으신다는 말에 수군거림이 일었어요. JFB가 보기에 이 수군거림은 삭개오에게 이미 지나간 이야기였을 거예요. 마음은 그 순간 이미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에요.

삭개오는 일어서서 스스로 말했어요. 가진 것의 절반을 나누고, 부당하게 취한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선언했어요. 아담 클라크에 따르면 로마법이 요구하는 배상은 잘못이 드러났을 때만 해당했는데, 삭개오는 아무 증거도 없이 스스로 이렇게 결심한 거예요. 강요 없이 나온 이 결심이야말로 그의 마음이 정말 바뀌었다는 증거겠죠.

예수님은 이 장면을 지켜보던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어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언하셨어요. JFB는 이 말씀이 혈통이 아니라 믿음을 가리킨다고 설명하며,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목적이 바로 여기서 이루어졌다고 풀어요. 나무 위에서 시작된 하루가 그렇게 완전히 달라진 거예요.

오늘 내려오는 한 걸음

키가 작아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님을 볼 수 없었던 삭개오처럼, 오늘도 사람은 여러 이유로 자신을 숨기고 싶을 때가 있어요. 관계가 불편해서, 실수가 부끄러워서, 혹은 그저 지쳐서 나서지 못할 때가 있어요. 삭개오는 나무 위에 숨어서라도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지만, 정작 예수님은 그를 나무 아래로 불러 내리셨어요.

오늘 해 볼 수 있는 작은 행동은 크지 않아요. 미뤄 둔 연락 하나를 다시 보내는 일, 마음에 걸리던 대화를 짧게라도 다시 시작하는 일이면 충분해요. 숨어 있던 곳에서 한 걸음만 내려오면 돼요.

저녁 식탁 위 찻잔 곁에서 한 사람의 두 손이 휴대폰으로 문자를 쓰고 있다

기도도 마찬가지예요. 잘 정리된 말을 준비하지 않아도 돼요. 지금 마음에 걸리는 것 하나를 그대로 아버지께 말씀드리는 것으로 충분해요. 삭개오가 특별히 준비한 말이 있어서 예수님이 그를 부르신 게 아니었어요. 예수님이 먼저 그의 이름을 부르셨고, 그는 그 부름에 응답해 내려왔을 뿐이에요.

오늘 내가 숨어 있는 나무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은 시작이에요. 사람들의 시선일 수도, 반복된 실패일 수도, 혹은 익숙해진 회피일 수도 있어요. 그 나무의 이름을 알아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내려올 준비가 시작된 거예요.

거창한 결심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오늘 하루, 숨어 있던 곳에서 한 걸음만 나오는 것, 그것이 삭개오의 이야기가 오늘 나에게 건네는 몫이에요.

아직 나무 위에 남은 마음

삭개오는 나무 위에 올라가서야 예수님을 볼 수 있었지만, 그 나무는 동시에 그를 숨겨 주는 곳이기도 했어요. 멀리서 보되 들키지 않으려는 마음, 궁금하지만 다가서기는 두려운 마음이 그 나무 위에 함께 있었어요.

돌아보면 지금의 기도나 신앙도 비슷한 모양일 때가 있어요. 말씀을 읽고 싶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싶으면서도, 정작 이름이 불리는 순간은 피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멀리서 지켜보는 정도로 만족하려는 마음이 은근히 굳어지기도 해요.

빈 의자가 늘어선 예배당 뒷줄에 한 사람이 뒷모습으로 앉아 앞쪽 십자가를 바라본다

예수님은 삭개오가 준비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이름을 부르셨어요. 오늘의 물음도 비슷해요. 나는 아직 나무 위에서 지켜보는 쪽에 머물러 있는 건 아닐까요. 누군가 이름을 부를 때 내려올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정답을 서둘러 내지 않아도 괜찮아요. 다만 이 물음을 오늘 하루 마음에 데리고 다녀 보는 것, 그것으로 충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