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정말 이웃을 사랑하고 있을까
바쁜 하루를 보내고 나서 문득 오늘 누군가에게 무심하게 굴었던 순간이 떠오를 때가 있어요. 도와줄 수 있었는데 지나쳤거나, 말 한마디를 건넬 수 있었는데 그냥 넘어간 일이에요. 그런 순간이 지나가면 마음 한편이 불편해지곤 해요.
이웃 사랑이라는 말은 교회에서 자주 듣는 말이에요. 그런데 그 말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향한 것인지, 어디까지 해당하는지는 늘 흐릿하게 남아 있곤 해요.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은 쉽게 떠오르지만, 길에서 마주치는 낯선 사람이나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까지 그 범위에 넣기는 쉽지 않아요.

누군가는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을 마음의 태도로만 생각할 때가 있어요. 선한 마음을 품고 있으면 충분하다고 여기는 거예요. 하지만 마음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순간들이 분명히 있어요. 실제로 걸음을 멈추고, 시간을 내고, 손을 내밀어야 하는 순간이에요.
바쁜 일상 속에서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계획에 없던 지출이자 시간의 손실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그래서 마음으로는 동의하면서도 실제로는 지나치는 선택을 하게 될 때가 있어요. 그런 선택이 반복되면 이웃 사랑이라는 말이 점점 관념적인 단어로만 남게 돼요.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던진 질문도 이 지점에서 시작돼요. 그는 영생을 얻는 조건을 물으며 이웃의 범위를 따지려 했어요. 누구까지가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인지 경계를 정하고 싶었던 거예요. 이 질문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물음이에요. 나는 정말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지, 아니면 사랑해야 할 범위를 좁혀서 스스로를 편하게 만들고 있는지 돌아보게 돼요. 그 물음 앞에 오늘 함께 읽을 누가복음 10장 25절부터 37절이 놓여 있어요.
영생의 조건과 도망친 질문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다가와 영생의 조건을 물었어요. 존 길의 풀이로는 이 사람이 예수님의 지식을 시험하고 흠을 잡아 자기 명예를 높이려는 의도로 물었어요. 또 이 질문은 젊은 부자 관원의 질문과 같은 성격을 지녔죠. 자기 행위로 영생을 얻으려는 태도가 그 밑바탕에 있었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곧바로 답을 주시지 않고 되물으셨어요. 율법에 무엇이 쓰였는지, 어떻게 읽었는지를 물으신 거예요. 존 길에 따르면 이것은 하루 두 번 암송하던 「쉐마」를 가리켜요. 매튜 헨리가 보기에 이 방식은 율법교사 자신의 지식으로 스스로 답을 찾게 만드는 방법이었어요.

율법교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답으로 내놓았어요. 예수님은 그 답이 옳다고 인정하시고 그대로 행하면 살리라 말씀하셨어요. JFB는 이 말씀 속 「이것을」이라는 표현에 실린 무게를 눈여겨봤어요. 매튜 헨리가 보기에 그 무게 안에는 실제로 그렇게 살아왔는지를 묻는 지점이 숨어 있었죠.
바로 이 지점에서 율법교사는 자신을 정당화하려 했어요. 그래서 이웃이 누구냐고 되물었어요. 존 길에 따르면 당시 유대인들은 이웃이라는 말을 같은 민족,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으로 좁게 해석했어요. JFB가 보기에도 이 질문은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을 이웃에서 빼려는 의도로 던져진 것이었죠. 예수님의 비유는 바로 이 좁은 경계를 향한 대답이었어요.
강도 만난 사람 앞의 세 사람
제사장과 레위인 다음으로 사마리아인이 등장해요. JFB에 따르면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에게 파문당한 사람이자 악마와 같은 취급을 받던 존재였어요. 예수님은 바로 이 미움받는 인물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았어요.
30절부터 시작해요. 아담 클라크에 따르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유대에서 가장 번잡한 도로였어요. 제사장 만 이천 명이 여리고에 살며 이 길로 오갔고, 강도도 자주 출몰했죠.

31절과 32절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나가요. JFB의 추정으로는 이 둘이 성전에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을 거예요. 매튜 헨리가 보기에 이들은 자비를 베풀어야 할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그리하지 않았어요.
JFB에 따르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우연히 지나친 것이 아니라 보고도 피해 갔어요. 다가가 살펴본 뒤 지나갔다는 표현이 오히려 더 무겁게 다가와요. 도와야 할 책임이 가장 큰 사람들이 가장 먼저 등을 돌린 셈이에요.
33절과 34절에서 사마리아인이 다가와요. 아담 클라크에 따르면 그는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부었는데, 이는 당시 흔히 쓰인 치료법이었어요. JFB는 그가 자기 짐승에는 다친 사람을 태우고 자신은 걸어갔다는 점을 눈여겨봤어요.
35절에서 그는 주막 주인에게 돈을 맡기고 떠나요. JFB에 따르면 그 액수는 노동자 며칠 치 품삯에 해당해요. 도움이 그 순간에 끝나지 않고 이어지도록 마음을 쓴 셈이에요.
36절과 37절에서 예수님은 처음 질문을 뒤집어요. 매튜 헨리가 보기에 예수님은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는 물음을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로 바꾸어 물으셨어요. JFB에 따르면 율법교사는 사마리아인이라는 말을 차마 못 하고 「자비를 베푼 자」라고 돌려 답했죠.
그 대답 안에는 이미 답이 들어 있었어요. 이웃은 같은 편인지 아닌지로 정해지지 않고, 자비를 베푸는 그 행동에서 비로소 드러나요.
오늘 내가 지나칠 뻔한 이웃
오늘 하루를 돌아보면 누군가를 그냥 지나친 순간이 떠오를 수 있어요. 바쁘다는 이유로, 나와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눈을 돌린 일이 있을 거예요. 그 순간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지만, 지금 다시 보면 자비를 베풀 기회였을 수 있어요.
율법교사는 이웃의 범위를 정하려 했지만, 예수님은 그 범위를 지우셨어요. 제사장과 레위인은 마땅히 도와야 할 위치에 있었지만 지나갔고, 사마리아인은 오히려 경계 밖의 사람이었지만 멈춰 섰어요. 이 뒤바뀜은 오늘도 똑같이 일어날 수 있어요. 신앙의 경력이나 지식이 많다고 해서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니에요.

내가 오늘 만난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사람과 같은 처지에 있었는지 생각해볼 수 있어요. 어쩌면 그 사람은 내가 익숙하게 지나치던 길 위에 있었을지도 몰라요. 도움이 필요한 얼굴을 알아보는 눈은 자주 연습해야 자라나요.
이웃이 누구인지 묻는 대신, 내가 누구에게 이웃이 되어줄지를 물어야 해요. 이 질문은 대답하고 끝낼 질문이 아니라 매일 다시 던져야 할 질문이에요. 오늘 하루, 내가 지나칠 뻔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그 답을 찾아가는 동안 신앙은 비로소 걸음이 되어요.